바쁘게 살아오다 문득 일상에서 한 걸음 물러나, 나만의 소중한 기록을 남겨보고 싶어지는 날이 있지요. 늦더위가 채 가시지 않은 평일 오후, 고즈넉한 풍경 속을 거닐며 사색을 즐기는 하루였습니다.
1. 기억의 저편에서 꺼내 든 이름, 분황사 모전석탑

문득 삶의 속도가 느려지는 날이 있습니다. 평생을 교단에서 아이들과 함께 숨 가쁘게 달려오다가 이제는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을 마주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며칠 전, 늦더위가 채 가시지 않은 평일 오후에 홀로 경주 분황사를 찾았습니다.
발걸음을 옮기며 머릿속을 스친 것은 먼 옛날 학창 시절, 교과서 귀퉁이에 밑줄을 쳐가며 외웠던 '분황사 모전석탑'이라는 다섯 글자였습니다. 당시 학교 수업 시간에 들었던 생생한 일화들이 귓가를 스쳤습니다. 화강암을 깎아 만든 여느 석탑들과 달리, 회색빛 안산암을 벽돌 모양으로 정교하게 잘라 한 장 한 장 쌓아 올린 그 독특한 '모전(模塼) 양식'의 감동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현재는 3층의 규모로 남아있지만, 원래는 7층 혹은 9층에 달하는 웅장한 높이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탑은 선덕여왕 3년(634년)에 세워진 신라 최고(最古)의 석탑입니다. 세월의 풍파 속에서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수리를 거치는 아픔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의연함은 보는 이의 숨을 멎게 합니다.

2. 기단 위의 사자상, 그리고 역사 속 아픔을 마주하다

- 탑을 향해 가까이 다가서면 단단한 기단부 사방에서 늠름하게 자리 잡고 앉아 석탑을 수호하는 사자상들을 만나게 됩니다. 학창 시절 선생님께서 들려주셨던 이야기 속 바로 그 사자상들입니다.
- 자세히 관찰해 보면, 특정 방향을 향하고 있는 사자의 앞다리 하나가 훼손되어 비어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뼈아픈 역사의 상처와 일제강점기의 수난을 말없이 증언하는 듯하여, 석탑 주변을 시계 방향으로 돌며 소원을 비는 '탑돌이'를 행하는 동안 마음 한쪽이 참 먹먹해졌습니다.
- 불교적 수행의 일환으로 합장한 채 석탑을 오른쪽에 두고 세 바퀴를 도는 '우요삼잡'의 과정은 단순한 관광을 넘어섭니다. 묵언 속에 발걸음을 옮기며 일상의 잡념을 비워내고, 천년 전 석공들이 지녔던 간절한 염원과 교감하는 고요한 사색의 시간이 됩니다.
3. 사찰 안의 작은 우주, 호국용변어정과 당간지주

- 분황사의 매력은 모전석탑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경내 중심부를 거닐다 보면 삼국유사 기록에도 등장하는 유서 깊은 석정(우물), 즉 '호국용변어정'을 마주하게 됩니다.
- 이 우물은 외형이 불교의 8정도를 상징하는 팔각형으로 정갈하게 둘러싸여 있으며, 내부 구조는 원융무애의 진리를 담은 원형으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나라를 지키던 용이 물고기로 변해 숨었다는 신비로운 전설을 품고 있는 이 석정은, 단순한 취수원을 넘어 고대 신라의 우주관과 예술적 정교함이 집약된 조형물입니다.
- 또한, 사찰의 담장 너머 탁 트인 잔디밭 한가운데 의연하게 서 있는 당간지주는 신라 사찰이 지녔던 장엄하고 거대한 가람의 규모를 짐작하게 합니다. 현대의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이러한 유적들을 마주하고 있으면, 시간의 흐름을 초월한 깊은 위로와 평온을 얻게 됩니다.
4. 마음의 결을 씻어내는 범종각 타종 체험과 여행 정보

경내 한켠에 자리한 범종각에서는 방문객들이 직접 목채를 당겨 종을 쳐볼 수 있는 뜻깊은 타종 체험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1,000원 이상의 자발적인 보시를 통해 참여할 수 있으며, 이 소중한 수익금 전액은 불우이웃돕기에 쓰인다고 합니다.
종을 당기는 순간 묵직하고 그윽한 울림이 경내 전체로 퍼져나가는데, 그 파동 속에서 마음속에 쌓여 있던 묵은 스트레스와 번뇌가 말끔히 씻겨 내려가는 듯한 개운함을 선물 받습니다.
- 위치 정보: 경상북도 경주시 분황로 94 (구황동 312)
- 관람료: 무료
- 주차 시설: 넓고 여유로운 전용 주차장이 완비되어 있어 주말이나 성수기에도 편리하게 주차할 수 있습니다. 인근 맛집이나 카페 이용 시 주차 공간으로 활용하기에도 좋습니다.
- 대중교통: 경주시내에서 불국사 방향으로 향하는 시내버스가 분황사 앞을 경유하므로 뚜벅이 여행객에게도 훌륭한 접근성을 자랑합니다.

분황사는 계절마다 피어나는 코스모스와 황화코스모스 군락지가 장관을 이루어 자연의 아름다움을 더해주며, 인근의 황룡사역사문화관, 첨성대, 동궁과 월지로 이어지는 경주 시내권 역사 여행의 핵심 거점입니다. 은퇴 후 삶의 여백 속에서, 천년의 역사가 숨 쉬는 분황사의 고즈넉한 돌담길을 거닐며 진정한 쉼의 의미를 되새겨보시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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