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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맛집

수집가의 시선으로 마주한 세대 간의 취향: 경주 키덜트 뮤지엄에서 발견한 기억의 파편들

by 그래 잘했어. 2026. 10. 22.

인간은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모으는 존재다. 생존을 위한 축적이 아니라, 마음의 허전함을 채우거나 특정한 시공간을 붙잡아두기 위한 방어기제로서 '수집'은 작동한다. 신기하게도 취향은 유전되는 것인지, 나는 평생을 인형과 피규어를 수집해 오신 어머니의 유전자를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어머니는 오랜 세월 전 세계 각국의 정교한 '부엉이' 소품과 인형들을 수집하는 데 심취해 계셨고, 그 모습을 보며 자란 나 역시 어느새 야드로(Lladró)의 섬세한 포인셀라 인형들과 빌레로이앤보흐(Villeroy & Boch)의 크리스마스 토이 시리즈, 그리고 봄의 생기를 담은 부활절 바니(Bunny) 토이 컬렉션을 모으는 일에 깊이 빠져들곤 했다.

물건을 모으는 이들이라면 공감하겠지만, 수집품이란 단순한 사물이 아니다. 그것은 그 물건을 모으던 당시의 시간, 공기, 그리고 기억의 결합체다. 연이틀 내리던 궂은비로 몸과 마음이 지쳐있던 어느 날, 어머니를 모시고 경주 보문단지로 향한 것은 어쩌면 운명적인 수집가들의 외출이었는지 모른다. 날씨 탓에 야외 활동이 제한되어 피로감이 밀려왔지만, 보문 콜로세움 건물 내부에 자리 잡은 '경주 키덜트 뮤지엄'은 우리 모녀의 수집광 기질을 단번에 일깨워준 뜻밖의 보물창고였다.

로마의 콜로세움을 모티브로 지어진 경주 키덜트 뮤지엄의 건물 입구 모습

1. 공간의 재정의: 콜로세움 건축물 속에서 펼쳐지는 시간 여행

경주 보문관광단지의 랜드마크 중 하나인 경주 콜로세움은 이국적인 외관으로 관광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그 외관의 화려함 뒤에 가려진 내부 공간이 이토록 정교한 타임캡슐일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뮤지엄은 1층과 3층으로 공간이 나뉘어 있으며, 단순한 장난감 나열을 넘어 인류의 매체사(史)와 대중문화의 궤적을 촘촘히 엮어낸 박물관 형태를 취하고 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마주한 거대한 아이언맨과 마징가Z 조형물은 세대를 초월한 서브컬처의 힘을 증명한다. 어머니는 거대한 로봇을 보며 자식 세대가 열광하던 대중문화를 신기해하셨고, 나는 그 속에서 어린 시절 향수를 자극하는 추억의 파편들을 마주했다.

키덜트 뮤지엄 야외에 설치된, 압도적인 크기를 자랑하는 아이언맨 헐크버스터 대형 조형물의 모습

2. 1층 전시관: 아날로그 매체의 진화와 레트로의 미학

빈티지한 필름 영사기와 축음기, 레트로 소품들, 그리고 영화 관련 장비들이 가득 채워져 있어 영화와 아날로그 매체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공간

1층의 중심은 단연 인류가 시각과 청각을 기록하고 확장해 온 역사적 매체들의 전시다.

철제 기둥을 활용한 독특한 선반 구조물 안에 아톰, 도라에몽, 그리고 각종 피규어들이 칸칸이 진열되어 있으며, 통로 주변에는 배트맨, 다스베이더 등 유명 영화 캐릭터 피규어들이 세워져 있어 다채로운 볼거리를 선사
  • 매직 랜턴(촛불 영사기)과 영사기의 역사: 1646년에 고안되어 현대 영사기의 시조가 된 '매직 랜턴'의 실물을 마주한 순간은 경이로웠다. 전기가 없던 시절, 촛불과 거울, 렌즈의 광학적 원리만을 이용해 손으로 직접 그린 이미지를 투사하던 그 장치에는 시대를 앞서간 인간의 창의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뒤이어 등장하는 1920년대 미국산 필름 영사기들과 전축, 그리고 60-70년대의 라디오들은 기술이 얼마나 아날로그적인 감성에서 출발해 고도화되었는지를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 생활 가구 속의 위트 - 자개장과 피규어의 만남: 한국 근현대 가정의 상징이었던 화려한 자개장 가구 전시 구역은 이번 관람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였다. 고급 가구의 대명사였던 자개장 문을 열면 예상치 못한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전통적인 자개 문양 속 안식처에 현대 글로벌 팝 문화의 아이콘인 BTS 멤버들을 정교하게 재현한 피규어들이 배치되어 있다. 전통과 현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세계의 이색적인 조우는 수집가로서 바라보기에도 매우 신선한 충격이었다.
  • 통신의 여명기: 대중화 이전의 하이텔 전용 PC 통신 단말기를 마주했을 때, 어머니와 나는 모뎀 소리가 삐걱거리며 울리던 90년대 초반의 기억을 동시에 소환했다. 텍스트 기반의 화면 속에서 세상을 만나던 그 시절의 공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세계 최초의 영사기로 알려진 촛불 영사기(매직 랜턴) 관련 전시물의 모습. 1646년에 촛불과 거울, 렌즈를 이용하여 그림을 크게 비추는 원리를 고안하면서 탄생한 현대 영사기의 시조를 보여주는 자료

 

3. 3층 전시관: 피규어 컬렉션과 대중문화의 아카이브

폐기된 전자 기기의 기판(회로 부품)들을 촘촘하게 이어 붙여 만든 거대한 로봇 형태의 정크아트 조형물

계단을 따라 3층으로 오르는 동선마저도 공간 예술의 연속이다. 계단 벽면을 가득 채운 설치 미술과 재치 있는 조형물들은 관람객을 지루할 틈 없이 다음 공간으로 이끈다.

오래된 노란색 브라운관 TV 내부를 하나의 디오라마 공간으로 활용하여,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 피규어들을 아기자기하게 배치해 마치 동화 속 한 장면
  • 세대를 아우르는 캐릭터 아카이브: 3층에 들어서면 마블, DC, 스타워즈의 대형 피규어부터 지게를 짊어진 해학적인 다스베이더 조형물까지 유머러스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들이 반긴다. E.T., 토이 스토리의 우디와 버즈, 미키마우스, 그리고 도라에몽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아이들과 어른들의 영원한 친구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다.
  • 수집가의 시선으로 바라본 문방구 컬렉션: 내가 빌레로이앤보흐의 크리스마스 토이 시리즈나 야드로 인형을 수집하며 느끼는 '정교함에 대한 집착'은 사실 어린 시절의 문방구 문화에서 싹텄는지 모른다. 전시장 한쪽에 마련된 자석필통 컬렉션(로봇과 공주 디자인), 아톰의 책가방과 신발주머니, 그리고 80-90년대 감성을 자극하는 K-아이돌 책받침들은 단순한 물건을 넘어 그 시절의 정체성이었다.
  • 브라운관 TV와 미디어 아트의 연출: 오래된 골드스타 브라운관 TV를 투명한 쇼케이스 장식장처럼 활용하여 피카츄, 텔레토비, 인형들을 배치한 연출은 디자이너의 감각적 노고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기계는 낡아 용도를 다했지만, 그 안에 담긴 캐릭터와 기억은 영원히 생명력을 유지한다는 메시지를 던져준다.
아기자기하게 진열된 추억의 로봇과 다양한 변신 합체 로봇 피규어들이 채워져 있는 모습
'못난이 사형제' 인형 의 모습( 투박하면서도 웃거나 찡그리거나 울음을 터뜨리는 등 각각의 익살스럽고 개성 있는 표정이 어린 시절의 향수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함)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영희 인형과 인기 애니메이션 캐릭터인 뽀로로 풍선 등 현대적인 대중문화 소품들

4. 관람 정보 및 실용적 팁

전통적인 자개장 안에 BTS 멤버들의 모습을 정교하게 재현한 7개의 피규어가 나란히 전시

경주 여행 중 날씨의 변동성(특히 비 오는 날)에 구애받지 않고 쾌적하게 방문할 수 있는 실내 코스로 이곳은 최적의 선택지다.

  • 위치: 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로 132-16 (경주 콜로세움 1층 및 3층)
  • 운영 시간: 매일 10:00 ~ 18:30 (연중무휴로 운영되어 일정 조율이 용이함)
  • 주차 환경: 건물 부지 내 전용 주차 공간이 마련되어 있어 주차가 매우 편리하다.
  • 입장료: 현장 발권보다 네이버 사전 예매를 이용할 경우 할인된 가격(성인 6,700원, 청소년 6,300원, 어린이 및 경로 6,000원 선)으로 이용할 수 있어 사전 예매를 권장한다.
  • 체험 이벤트: 전시장 내 숨겨진 '키뮤' 캐릭터를 찾는 스탬프/사진 미션 이벤트가 운영되고 있으며, 미션 완료 시 소소한 뽑기 기회를 통해 사탕 등의 기념품을 제공하여 관람의 몰입도를 높여준다.
키덜트뮤지엄 경북 경주시 보문로 132-16

5. 글을 마치며: 수집이 주는 위로

철완 아톰 조형물의 모습( 아톰이 빨간색 가방을 들고 밝게 웃고 있는 모습 뒤로, 옛날 학창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추억의 책가방과 신발주머니들이 함께 진열되어 있어 친근한 향수를 불러일으킴)

어머니는 평생 부엉이와 아기자기한 인형들을 모으며 일상 속의 소소한 질서와 평화를 구축하셨고, 나는 나대로 세라믹 피규어들을 수집하며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지나간 시간을 붙잡아두려 애쓰는지도 모른다.

연이틀 내린 비로 지쳐있던 경주 여행의 여정 속에서, 경주 키덜트 뮤지엄은 어머니에게는 아득한 옛 시절의 향수를, 나에게는 수집가로서의 본질적인 희열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수천 점의 장난감과 레트로 소품들 사이를 어머니와 함께 거닐며, 우리는 물건 너머에 존재하는 서로의 기억을 공유했다.

비 오는 날의 무기력함을 말끔히 씻어내고, 3대가 함께 세대의 격차를 뛰어넘어 온화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공간. 이곳은 단순한 박물관이 아니라, 각자의 가슴속에 잠들어 있던 어린 시절의 수집광을 조용히 깨워주는 따뜻한 치유의 방이었다.